본문 바로가기
STUDY (공부)/MEDIA (미디어)

트루먼이 세트장을 떠나지 않고 결말을 맞이했다면

by phd.갖고싶은자 2021. 7. 31.

 

부제 : 넷플릭스 영화 블랙 미러 : 밴더스내치를 감상하고

 제목을 적으며 조금은 망설였다. 너무 블랙미러에 대한 혹평을 하는 것 같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이런 형식의 영화는 처음 접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신선했다. 심지어 선택지들을 모두 가지치기하고 하나의 결말로만 구성해서 영화화 했다고 해도 생각을 내려놓고 즐길 수 있는 영화였기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두 번째 이유는 제목의 은유가 어느 정도는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비록 쇼 내부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능동적으로 사고하면서 다양한 선택을 한다. 그의 선택은 그의 삶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고 시공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든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반면 블랙 미러를 감상하며 우리가 하는 선택 중 일부는 이후의 플롯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선택지를 강제적으로 선택하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엄밀히 보자면 블랙 미러와 트루먼은 결이 다른 것이다. 다만 내가 이와 같이 표현한 했던 것은 어딘가로 수렴하게 되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의 선택이(혹은 상호작용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을 정하게 된 것이다.

 

 사실 블랙 미러를 감상하면서 재미는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형식의 영화에 대한 새로운 충격 같은 것은 미약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블랙 미러와 거의 유사한 형식을 가진 게임을 이미 플레이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비 레인이나 혹은 스탠리 패러블과 같은 게임은 블랙 미러가 나오기 한참 이전에 같은 형식을 사용하며 호평을 받았던 게임들이다. 특히 이 중에서 헤비 레인 같은 경우는 화면에 표현되는 형상이 게임 그래픽이라는 점과 플레이어가 움직이며 특정 행동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블랙 미러와 정말 유사했기 때문에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뭔가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블랙 미러가 차용하고 있는 선택적 상호작용의 형식과 결부하여 신선한 영화적 경험이었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단지 내가 이러한 기존의 경험 때문에 영화의 상호작용성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5년 전으로 돌아가 내가 비슷한 종류의 게임을 해보기 전에 영화를 먼저 접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영화가 가진 상호작용성에 대해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영화가 시청자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영화적 경험은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영화의 줄거리 전개 과정에 참여하여 다양한 선택을 하고 이걸 바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결말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시청자를 주인공에게 혹은 영화 자체에 깊이 대입시켜 훨씬 몰입감 있고 다채로운 영화적 경험을 느끼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화적 경험은 시청자가 한 순간이라도 선택지가 후에 나오는 줄거리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깨닫거나 혹은 일정한 선택으로 의도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달성 불가하게 된다. 시청자는 영화에 몰입하며 그로부터 우리가 우리 삶에서 느끼는 일정 수준 이상의 상요작용의 기대하지만 영화는 그것보다 훨씬 떨어지는 수준의 상호작용(단순 물리적, 제한적 상호작용)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선택지마다 다른 경우의 수로 이어져 다른 결말로 가는 수많은 갈레를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더불어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결말은 특정 개수로 나뉘어져 수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제작자가 의도한대로 시청자가 영화적 경험의 질적 가치상승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청자가 영화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사유하는 행위를 하지 않거나 혹은 의심 없이 정말 순진무구한 아이와 같이 감상하는 방식을 영화 내내 고수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시청자가 비판적인 감상을 영화에서 배제하거나 혹은 실제로 아이가 아닌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블랙 미러의 상호작용이 영화적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몰입을 깨지게 하고 감상적 사고를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블랙 미러의 상호작용에 대한 비판이 영화적 경험의 상호 작용을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자가 만들어 놓은 몇 가지의 결말로 결국에는 수렴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시청자는 영화를 보면서 일종의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결말은 같은 종착지에 도달하더라도 적어도 시청자가 선택지를 고른 그 순간은 영화와 상호작용하며 스크린에 나오는 형상과 재생되는 사운드를 바꿀 수는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단순 물리적 상호작용이 시청자가 영화와 더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은 의문이다.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경험이 없거나 매우 적은 사람을 시청자로 가정한다면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새로운 장르를 신기하게 여기고 탐구하고자 할 것이기에 더욱 더 각 선택에 대해 열중하고 능동적으로 새로운 영화 형식을 탐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첫 경험의 설렘도 잠시 선택적 상호작용 형식에 조금 더 익숙해진다면 시청자는 능동적으로 이를 행하고자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본인의 선택임에도 그에 따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다시 돌아가 다른 선택지들을 골라가야 하는 것에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영화적 경험 방식이 능동적 상호작용성을 강화하는 지에 대한 질문은 시청자가 어떠한 선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갈릴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만약 단순히 물리적인 상호작용으로 상호작용성을 정의한다고 하면 제한적인 정의가 되겠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수용자들에게 상호작용의 기회를 확대하고 있는 것은 맞다. 이번에 시청한 블랙 미러 혹은 각종 vr게임 혹은 증강현실 등등은 즉각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반응하여 미디어와의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가시적으로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구분 짓는 디지털만의 고유 특징이 될 수는 없다. 아날로그 시스템에서도 디지털과는 다른 의미의 상호작용성은 분명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결말 부분을 열린 결말로 만들거나 혹은 몽타주 기법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시청자가 정신적으로 미디어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여러 형식들이 아날로그 시대에 이미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수용자들에게 전례 없는 상호작용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상호작용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선택한 것이 물리적인 변형으로 내 눈에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의 감정과 심상, 사유, 논리와 같이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상호작용을 모두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일종의 눈속임 선택지 같은 경우 결국은 우리를 완성된 결말로 이끌어가고, 여기에 우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다시 말해, 디지털 테크놀로지 안에서 정신적인 상호작용은 부정당하는 것이다(그러나 다만 물질적인 상호작용이 매우 직관적으로 인식 가능하기 때문에, 수용자는 이것이 정신적인 차원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는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블랙 미러로 대표되는 뉴미디어 상호작용성의 장점과 한계는 명확해진다. 물리적인 상호작용성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수용자들의 욕망과 의지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기에 용이하지만 이는 전부 완성되어진 틀 안에서만 전개되기 때문에 수용자는 결국 트루먼 쇼에 갇혀 있는 트루먼과 같은 것이다. 수용자는 트루먼처럼 비록 세트장 안이지만 즐거움을 찾고, 능동적으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자신에게 자유가 있다고(온전한 의미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트루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쇼를 뒤로하고 언제라도 아침, 점심, 저녁 인사를 마치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할 것이다.

댓글